잃고 나서 피어난 맛

이른 아침, 아직 세상이 잠결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거리는 희미한 안개 속에 잠겨 있었고, 간간이 스치는 바람조차 졸음을 이기지 못한 듯 나른했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지만, 도시의 심장은 아직 깊은 꿈 속에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더운 기운이 피부에 스며들었고, 그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뜨겁지 않은, 오히려 살결을 다독이는 손길 같았다. 나는 그 온기를 등에 지고, 오래도록 다니던 작은 식당의 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공간 안에는 늘 그러하듯 국물 냄새가 가득했다. 구수하면서도 은근히 깊은 향. 식탁 위에 놓인 뚝배기 속 설렁탕은 언제 보아도 한결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두 손을 모아 잠시 눈을 감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 앞에서 나는 묵상에 잠겼다. 따뜻한 향기가 가슴 속으로 스며들며,
오래된 기억을 불러올 듯 아련히 퍼졌다.

그때, 옆자리에서 잔잔한 대화가 흘러나왔다. 노부부의 목소리였다.
낡았지만 온기가 남아 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처럼,
그들의 말소리는 낯설지 않은 음악처럼 내 귀를 적셨다.

“여보, 우리 옛날에 못살던 시절, 시장터에서 먹던 설렁탕 기억나오?”
“난 그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짧은 몇 마디였으나, 그 순간 시간은 고요히 멈추었다. 공기마저 숨을 죽이고, 오직 그들의 목소리만이 세상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 설렁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기를 달래주던 한 그릇이자, 고단한 세월을 함께 건너온 증거였다. 가난했던 시절의 설렁탕은 이제 그들의 삶을 빛내는 추억의 보석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게는 그런 설렁탕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대신 내 어린 시절의 한 모퉁이에는 어머니의 사골국이 놓여 있었다.

큰 솥에서 며칠이고 불을 지펴 우려내던 국. 하얗게 피어오르던 김.
어머니는 말없이 국을 푸셨고, 우리는 말없이 그 국을 먹었다. 재탕에 또 재탕을 거듭했지만 누구 하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린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국물 속에는 고기보다 더 많은 사랑이 담겨 있었고, 양념보다 더 깊은 정이 배어 있었다. 사골국은 내 유년을 감싸던 담요 같았다. 늘 곁에 있었고,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온기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코로나 후유증으로 미각을 잃은 지 2년이 넘었다.
사람들은 안쓰럽다는 듯 묻는다.
“맛을 못 느끼면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무슨 재미로 음식을 드세요?”

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나는 지금,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맛을 느끼고 있다고.

짠맛은 바닷가 파도 소리로 다가오고, 단맛은 첫눈 내리던 날 아이의 눈망울처럼 빛난다.
쓴맛은 오래된 편지의 활자처럼 마음을 저미고, 매운맛은 눈물처럼 속을 데운다. 혀로는 느낄 수 없지만, 가슴으로 피어나는 새로운 미각. 그것은 잃음의 자리에 새로이 놓인 선물이었다. 나는 미각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미각을 얻은 사람이다.

삶은 종종 잃음을 통해 더 깊은 것을 얻게 한다. 때로는 불행이라 여겨진 일이 오히려 축복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결국 고통도, 결핍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빛깔로 삶을 물들인다.

나는 믿는다. 이 모든 깨달음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의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출 때, 세상의 상실은 새로운 선물의 형태로 내게 다가온다.

오늘도 나는 설렁탕 한 그릇 앞에 앉아, 입이 아닌 마음으로 그것을 맛본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맛을 잃고, 더 깊은 맛을 얻게 하심에 감사합니다.”